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시아 침공 (문단 편집) == 원인 == [[북아프리카 전선]]에 독일군이 등장한 이후 패퇴를 거듭하고 있던 영국은 동시기에 일어난 [[이라크 왕국]]의 반영 정권 성립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 지역의 뿌리 깊은 반영 정서를 체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반영 정서는 [[페르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건 영국의 탓이 큰데 19세기 이후 여러 이권 문제로 영국군이 심심하면 페르시아에 침공하거나 개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의 입장에서는 원인에 상관없이 벌어진 전쟁에서 승리해야 살아남을 상황이었으며, 영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이라크는 비교적 쉽게 침공에 성공했으나 소련-영국의 긴장관계 속에서 나름대로 힘을 키운 [[팔라비 왕조]]가 친독을 전면에 내세운다면 영국군은 독일군 이전에 반영 폭동에 시달리다 지리멸렬할 수 있었다. 거기다 영국은 앵글로-페르시아 석유회사가 보유한 이란의 유전들이 전쟁 수행에 꼭 필요했고 위에서 말했듯 당시 이라크 왕국을 침공한 직후라 이란의 바로 옆 동네인 이라크에 대규모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 침공하기 최적의 조건이었다. 소련 역시 개전 이래 참담한 패퇴를 거듭하여 병력 및 장비물자의 소모가 극심해졌으나 이를 보충할 여력은 충분치 않았다. 주요 산업시설을 모두 뜯어내어 [[우랄산맥]] 쪽으로 이전하던 중이라 사실상 주요 생산시설이 마비된 상태에선 아무리 인적자원이 풍부한 소련이라 하더라도 이들을 무장시킬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영국으로부터 [[무기대여법|렌드리스]]를 통해 물자 및 장비지원을 받기로 했으나 가장 짧은 루트인 영국-무르만스크 항로가 유보트의 공격과 함께 나치 독일, 핀란드군이 [[무르만스크]]로 다가오면서 점점 위험해지고 있었다. 이에 소련은 북방항로의 대체로서 페르시아를 통한 보다 안전한 렌드리스 루트를 확보하기로 했다. 이렇게 영국과 소련의 입장이 맞아떨어지자 페르시아에 대한 침공이 결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